유다영식 소설적 사진찍기 (임이정)
고백건대 나는 사진을 잘 모른다. 다만 작가 유다영을, 그녀의 사진을, 애정을 담아 꽤 오랫동안 지켜본 친구이자, 소설가이다.
열린 차 창문으로 불어오던 바람을 맞으며 작업에 대한 고민을 나누던 다영의 뺨이 유난히 붉었던 기억이 난다. 다영은 사진을 통해 시각적으로 확보되지 않는 ‘시선’을 프레임에 정착시키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사진기라는 도구에 대한 연구이자 작업적 실험의 일환이었다. 《없었던 것으로부터의 시선》이라는 개인전은 작가가 몇 년간 골몰해 오던 고민의 흔적과 발자취다.
이번 다영의 작품을 보고 받은 첫인상은 ‘역시 다영답다.’는 것이었다. 정적이고 일상적인 이미지에서 풍기는 특유의 몽환적이고 오묘한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시명에서부터 작품에 적혀있는 각각의 타이틀까지, 그녀가 고심해서 적었을 길고 짧은 문장들 때문이었다. 사진에 점자 텍스트를 입힌 다영의 이전 전시, 《점자 이미지에서 파생된 타이포 시와 노래 2023》만 봐도 알 수 있듯 그녀의 작품에서 문자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자는 다영의 작업에 있어 작품 설명을 위한 부차적인 요소가 아니라 작품 자체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그녀가 평소 서사와 텍스트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 혹은 내 직업적인 이유에서인지 나는 다영의 작품이 소설과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때문에 다영이 포착한 이미지들이 세상에 나온 방식을 소설적 사진찍기라고 표현하고 싶다.
사소설 등의 예외는 있을 수 있지만 거의 모든 소설은 픽션을 원칙으로 한다. 있는 것을 찍는, 사물을 가장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사진은 어쩌면 소설과 정반대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영의 작업을 소설적 사진찍기라 말한 까닭은 그녀의 작업이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고무줄놀이하듯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감상한 다영의 작품은 일상적이고 사실적인 이미지를 미시적으로 담고 있다. 창문과 꽃, 커튼과 물가, 발레 슈즈와 계단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차적으로 이미지를 텍스트와 함께 감상하면 작품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감상자에게 다가온다. ‘없었던 것’이라는 허구의 눈을 통해 바라본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알고 있는 창문과 꽃, 커튼과 물가, 발레 슈즈와 계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영의 작품은 사실과 실체라는 사진에 대한 견고한 믿음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허구와 상상을 심어놓고 있다.
(a)부터 (h)라 명명되는 ‘없었던 것’들은 죽은, 보이지 않는, 꿈속의 어떤 것일 것이다. 봤다고 말할 수 없는 어떤 것, 존재함에도 투명하다고 치부되는 것, 한 번도 이름을 가져 본 적 없는 이들이다. 이 시선은 소설 속 3인칭 관찰자를 떠올리게 한다. 사건에 거리를 두고 관조하는 자, 사건에 참여하지 않거나 혹은 배제당한 자들 말이다. 다영은 이들, 3인칭 서술자를 1인칭으로 끌고 온다. 그들을 주체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말이다. ‘없었던’ 이들의 시선은 다영의 카메라를 빌려 지극히 절제된 색감으로 발현된다. 그것이 다영이 ‘없음’에 존재성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내게 다영의 작업은 ㄱ 혹은 ㅏ와 같이 혼자 따로 떨어져 있는 자모를 연상시킨다. 그 자체로는 의미를 연상시키기 힘든 커튼 조각, 묶여 있는 리본, 길에 피어있는 풀줄기가 전면에 등장한다. 의식 없이 스쳐 지나가면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의미도, 형체도 갖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다영의 작품은 정물을 포착하기보다는 특정 지점을 확대하거나 사진 전체를 뿌옇게 하고 지우기 바빠 보인다. 물질의 단단함, 분명함은 본질을 흐리고 감추기만 한다는 듯이 말이다. 이는 감상자의 시선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옮겨가게 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이다. 엉킨 리본이 고요한 물줄기처럼 파동 하는 모습 <시선 (d) - 계속되는 춤>이라던가 옅은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조각 <시선 (f-1) - f의 답장 (닿을 수 없어서 모든 게 무너지는 중일 때 그대로의 시선)>을 보라. 언제나 거기 있었지만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이미지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텍스트, 즉 타이틀은 다영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정한 가이드를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이드가 이끄는 곳으로 갔을 때 감상자들은 의외의 곳에 도착해 있을지도 모른다. 토끼를 따라간 앨리스처럼 말이다. 다영의 타이틀이 우리를 이끄는 곳은 논픽션의 세계다. 농담, 또는 말장난처럼 보이는 타이틀들은 사진에 느낌표(!)를 찍기보다는 물음표(?)를 찍게 만든다. 미지수를 연상시키는 알파벳으로 표기된 이 시선들은 <시선 (c) - 언어가 없는 곳으로부터 여름에 받았던 편지>라던가 <시선 (f-3) - 멀리 확장되었던 f의 꿈>처럼 존재하지 않는 시간, 대상을 담고 있다. 심지어는 <시선 (g) - d의 계속되는 춤을 바라보는>이라던가 <시선 (g-1) - f의 꿈에서 편집된 기억 장면>처럼 실체가 없는 이 시선들은 상호적이기도 하다. 다영은 작품의 타이틀을 통해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미지를 (f)-1,2,3처럼 연속된 선상에 의도적으로 배치하기도 한다. 분명 이미지가 있지만 감상자들은 그것만으로는 대상을 확신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다영이 만들어놓은 ‘타이틀’은 눈에 보이는 사실적 이미지에 대한 반발이며 상상과 이야기에 대한 환대로 작용한다. 텍스트와 줄다리기하며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은 이제 감상자의 몫이다.
다영의 작업은 흥미로운 방식으로 감상자를 이끄는 매력이 있다. 그녀의 작품이 하나의 상으로 우리 안에 맺히게 하기 위해선 감상자의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경험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만 한다. 최초에 작품 앞에 마주 설 때는 ‘없었던 것’의 시선을 빌려 대상을 감상하지만, 이후에는 개개인의 상상이라는 필터를 더해 제3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결국에는 없었던 것을 통해, 없었던 것을 창조해 내는 연금술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본 비평은 2025년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지원으로 작성 되었습니다
.
너무 가깝고 너무 먼 자를 위한 사진 (양효실)
유다영 작가는 자신의 생부인 고(故) 유선우씨를 ‘선우’라고 부르고 적는다. 성을 빼고 부르려는 공동체에서, 흔히 ‘아버지’의 역할이나 헤게모니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여성-퀴어 공동체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을 언제부터인지 자주 들었다. 아버지로의 귀속을 거부하려는 이러한 ‘버릇없는’ 젊음들, 과거를 뺀 현재의 가벼움으로 유랑하려는 젊음같아서 나도 언제부턴가부터 그런 호명을 모방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버지를 이름으로 부르는 다영은 어쨌든 내가 새로 배워야 하는 먼 데 있는 사람이었다.
주지하듯이 바르트는 사진의 고유한 존재론이 “그때 거기에 있었다(ça y était)” 혹은 “그것이-존재-했다(ça-a-été)”는 사실에 있다고 썼다. 사진은 찍히는 ‘순간’, 그 즉시 과거와 현재가 작동한다. 사진은 피사체를 찍는 순간 그 즉시 과거로 만들어 버리고, 이미지(현재)와 지시체(과거 혹은 부재)사이의 간극-거리가 우리에게 사진을 계속 보게 하는 심연으로 작동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지금-여기에 없는 것이고 그때-거기에 있었지만 지금 여기에 이미지로 재현된 것 사이의 상실이 우리의 계속 보려는 욕망을 지탱하는 힘인 것이다. 2년 전부터 다영이 시작한 사진 프로젝트인 “선우-찾기”는 그때-거기에도 없었던,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완전히’ 실종된 부재, 결여를 어떻게 현재의 사진으로 대리보충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다영은 자신의 작업의 “초점”인바 부재와 결여, 상실로서의 선우를 추적하는 프로젝트가 통상의 “가족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적 작업이 아니라고 작가노트에 적었다.
다영은 “사라진 인간과 보이지 않는 영역”이라는 좀 더 일반적인 삶의 이면, 타자성을 선우를 매개로 추적하려는 것이다. 다영은 이번 보고전에 출품한 몇 장의 사진을 자신의 집, 방에서 찍었다. 자신이 읽은/읽을 책들을 쌓아놓고(기억은 양화되고 반복된다), 그러나 책들의 제목이 보이는/읽히는 앞이 아니라 ‘뒤’를 정면으로 배치해서 이 쌓임이 어떤 이야기나 서사를 출현시킬 수 없음을 고지한다(〈목소리(The trill)>). 이 사진은 다른 사진과 달리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제목들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그 어떤 사진보다/만큼 불투명하고 모호하다. 반투명한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익사의 밖(Outside of Drowing)>이나 바깥(익명성)에서(도) 베일을 쓰고 나타나야 하는 인물(<오직 꿈 속에서 사는 사람>)은 지시체-정보-증언으로서의 사진에서 한참이나 이탈해 있다. <선명해서 희미한 침윤>은 아예 초점을 놓아버린 채, 흐릿하게 들어온 빛-바깥이 겨우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반-사진적 사진이다. 알아볼 대상이 부재하는 사진에 대신에 압도하는 정조(Stimmung)를 책임진 것은 텍스트 쓰기도 병행하는 다영의 문장들이다. 다영의 선우-찾기 프로젝트로서의 사진 작업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최승자)는 싯구가 전승하는 불확실함에 충실하다.
*본 비평은 2024년 대구에술발전소의 지원으로 작성 되었습니다
.
납작한 이미지가 부풀어 오를 때까지 (박지수)
사진은 보이지만, 정작 그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사진과 함께 있는 글을 소리 내 읽어 보지만, 정작 그 이야기에서 들을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다. 사진 위에 올려 진 점자를 만질 수 있었지만, 정작 그 점자를 읽을 수는 없었다. 유다영의 개인전 <점자 이미 지에서 파생된 타이포 시와 노래>(팩토리 2, 2023.7.18.~31.)가 열리는 전시장에서 나는 제대 로 볼 수 없었고, 들을 수 없었고, 읽을 수 없었다. 유다영의 사진은 구체적인 사건을 보여주 지 않았고, 그의 글은 기승전결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으며, 점자를 모르기에 만져봐야 아 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런 연유로 전시장을 맴도는 걸음마다 작은 실패들이 발자국처럼 남겨 졌다.
전시장에서 지나온 동선을 거슬러 어긋난 흔적들을 되밟으며 내게는 모호하게 다가왔던 사진 과 글 그리고 점자에 관해서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사진, 글, 점자 등 여러 매체를 동원할 것일까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나는 왜 보거나 듣 거나 읽거나 그 과정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나 스스로 의 문을 품게 되었다. 그동안 당연하게 보고 듣고 읽었던 수많은 것들, 그렇게 당연하게 여기면 서 나는 과연 무언가를 제대로 보았을까, 들었을까, 읽었을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장에서 무언가를 보았고, 무언가를 들었 고, 무언가를 읽었던 감각과 기억이 남아 있었다. 다만, 그것이 구체적인 정보나 명확한 이야 기처럼 분명한 형태를 띠지 않을 뿐이었다. 내 눈에는, 내 귀에는, 내 손에는 희미한 이미지와 가만가만한 목소리 그리고 어렴풋한 질감이 아직 고여 있었다. 그 여운들이야말로 내가 이곳 에서 이미지, 목소리, 질감을 감지했다는 증거였다. 어쩌면 작가가 원했던 것은 사진과 글, 점 자를 통해 어떤 분명한 의미나 명확한 이야기를 전하기보다는 보고 듣고 읽는 그 과정 자체를 다시 감각하는 일은 아니었을까. 만약 사진 속에서 선명한 대상을 볼 수 있었다면, 글 속에서 뚜렷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면, 점자 속에서도 투명한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면, 본다는 일과 듣는다는 일 그리고 읽는다는 일을 이렇게 다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유다영의 <점자 이미지에서 파생된 타이포 시와 노래>는 관객의 적극적인 개입을 기 다린다. 만약 그동안 대개 그랬듯이 그저 보이는 것에만, 들리는 것에만, 읽히는 것에만 머문 다면 전시장의 작품들은 모호하고 불투명한 모습으로만 다가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시장에 서 스스로 보고 듣고 만지고 읽는 과정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다면, 유다영의 ‘점자 이미지’, ‘타이포 시’와 ‘노래’는 우리의 모든 감각을 환대할 것이다. 이 전시가 장애의 유무, 또는 신체 적 능력의 차이와 상관없이 사진 이미지를 수용할 수 있게 열린 구조를 상상하며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전시장에서 나처럼 선명한 대상이나 분명한 이야기에만 집착하지 않는다면 사진과 글 그리고 점자 중에서 자신에 맞게 선택하고 감각할 수 있다. 사진이 글과 목소리로 바뀌고, 또 점자로 번역되면서 오로지 시각에만 의존하던 방식에서 이탈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 각의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는 작가가 사진을 다루는 방식과 태도와도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유다영이 찍은 사진 속의 장면이나 대상은 자기 주변의 사람들,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 자 신이 머물렀던 장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특별하게 멋진 풍경이나 유명한 사람들처럼 포토제닉한 피사체를 좇지 않는 셈이다. 무언가 흥미로운 이미지를 보거나 보여주 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상 속에서 좋아하고 소중한 것들을 간직하기 위한 차원에서 카메라를 드는 것이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점은 작가가 보았거나 카메라로 찍은 이미지를 텍스 트의 형태로 전환하는 과정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유다영의 사진 작업에는 사진에 담긴 비밀 들, 즉 촬영했을 때 보았던 것보다 초과하거나 부족한 무언가에 반응하는 글쓰기 과정이 포함 된다. 카메라라는 기계의 무차별적인 시각과 순간 포착으로 생성된 사진에는 언제나 현실에서 봤던 것보다 무언가가 더 보이거나 덜 보이게 된다. 이는 자신의 선호와 취향이 반영되는 선 별 시각을 지니고, 계속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사물을 보게 되는 인간의 눈에 닿지 않는 영역 이다. 그래서 사진에는 언제나 비밀이 담기고, 이 비밀은 사진의 수수께끼처럼 남게 된다. 이 사람의 얼굴이 이랬던가, 그때 이렇게 슬픈 표정을 지었던가, 그곳에서 저런 옷을 입었던가,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 그 답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불안으로까지 번지지 않게 하는 방식 중의 하나는 사진 속 장면의 육하원칙 정보를 캡션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캡션이 지시하 는 바대로 사진을 바라보면 내가 아는 장면이 되기에 불안을 조금씩 잠재울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영역을 확장하기보다는 캡션이 제공하는 정보의 양만큼으로 제한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즉 알지 못하는 부분은 결코 볼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진의 수용 방식은 보통 시각으로 제한되고, 또 아는 부분 으로만 한정시키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하지만 유다영의 사진과 연동된 글쓰기는 구체적인 정보보다 이미지를 둘러싼 반응과 정서적 분위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캡션 방식의 반대편에 있 다. 그 결과로 유다영의 작품에서는 사진에 글이 더해져도 의미와 이야기가 투명해지기보다는 오히려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텍스트가 더해져도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인 이미지를 바라보거 나 읽으려고 할 때 늘 그랬던 것처럼 시각과 정보에만 의존하는 방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 는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 이미지 앞에서 기존과 다른 방식을, 더 다양한 감각을 동원해 야 하지 않을까.
종이 위에서든, 또 스크린 위에서든 사진은 언제나 납작한 몸으로 눈앞에 나타난다. 우리는 오로지 표면만 볼 수 있는 시각에만 의존해 사진을 바라본다. 사진의 납작한 평면에는 소리 도, 질감도, 냄새도 머물지 못한다. 시야 확보를 위해 떨어져서 바라봐야 하는 눈은 끝내 거리 를 좁히지 못한 채 사진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납작한 이미지가 선명할수록 우리는 눈은 사 진에 더 가까이 갈 수 없고, 우리의 손은 사진에 뻗을 수도 없다.
납작한 사진에 글이나 점자 등 다른 매체와 감각을 불어넣는 작가 유다영은 우리가 눈에만 의 존해 바라보는 사진을 다른 방식으로 느껴보도록 일깨운다. 더 가까이 오라고, 손을 뻗어 만 져보라고. 그 과정은 우리가 사진을 바라볼 때 익숙했던 습관과 관성을 거스른다. 더 나아가 사진을 눈으로만 볼 수 있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다시 생각하도록 타이른다. 각자 결핍된 감 각에 자신의 정체성을 일치시키는 모순에서 벗어나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는 감각의 가능성 을 스스로 열어볼 수 있도록 다독인다.
사진은 보이지만, 정작 그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사진과 함께 있는 글을 소리 내 읽어 보지만, 정작 그 이야기에서 들을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다. 사진 위에 올려 진 점자를 만질 수 있었지만, 정작 그 점자를 읽을 수는 없었다. 유다영의 개인전 <점자 이미 지에서 파생된 타이포 시와 노래>(팩토리 2, 2023.7.18.~31.)가 열리는 전시장에서 나는 제대 로 볼 수 없었고, 들을 수 없었고, 읽을 수 없었다. 유다영의 사진은 구체적인 사건을 보여주 지 않았고, 그의 글은 기승전결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으며, 점자를 모르기에 만져봐야 아 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런 연유로 전시장을 맴도는 걸음마다 작은 실패들이 발자국처럼 남겨 졌다.
전시장에서 지나온 동선을 거슬러 어긋난 흔적들을 되밟으며 내게는 모호하게 다가왔던 사진 과 글 그리고 점자에 관해서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사진, 글, 점자 등 여러 매체를 동원할 것일까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나는 왜 보거나 듣 거나 읽거나 그 과정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나 스스로 의 문을 품게 되었다. 그동안 당연하게 보고 듣고 읽었던 수많은 것들, 그렇게 당연하게 여기면 서 나는 과연 무언가를 제대로 보았을까, 들었을까, 읽었을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장에서 무언가를 보았고, 무언가를 들었 고, 무언가를 읽었던 감각과 기억이 남아 있었다. 다만, 그것이 구체적인 정보나 명확한 이야 기처럼 분명한 형태를 띠지 않을 뿐이었다. 내 눈에는, 내 귀에는, 내 손에는 희미한 이미지와 가만가만한 목소리 그리고 어렴풋한 질감이 아직 고여 있었다. 그 여운들이야말로 내가 이곳 에서 이미지, 목소리, 질감을 감지했다는 증거였다. 어쩌면 작가가 원했던 것은 사진과 글, 점 자를 통해 어떤 분명한 의미나 명확한 이야기를 전하기보다는 보고 듣고 읽는 그 과정 자체를 다시 감각하는 일은 아니었을까. 만약 사진 속에서 선명한 대상을 볼 수 있었다면, 글 속에서 뚜렷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면, 점자 속에서도 투명한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면, 본다는 일과 듣는다는 일 그리고 읽는다는 일을 이렇게 다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유다영의 <점자 이미지에서 파생된 타이포 시와 노래>는 관객의 적극적인 개입을 기 다린다. 만약 그동안 대개 그랬듯이 그저 보이는 것에만, 들리는 것에만, 읽히는 것에만 머문 다면 전시장의 작품들은 모호하고 불투명한 모습으로만 다가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시장에 서 스스로 보고 듣고 만지고 읽는 과정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다면, 유다영의 ‘점자 이미지’, ‘타이포 시’와 ‘노래’는 우리의 모든 감각을 환대할 것이다. 이 전시가 장애의 유무, 또는 신체 적 능력의 차이와 상관없이 사진 이미지를 수용할 수 있게 열린 구조를 상상하며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전시장에서 나처럼 선명한 대상이나 분명한 이야기에만 집착하지 않는다면 사진과 글 그리고 점자 중에서 자신에 맞게 선택하고 감각할 수 있다. 사진이 글과 목소리로 바뀌고, 또 점자로 번역되면서 오로지 시각에만 의존하던 방식에서 이탈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 각의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는 작가가 사진을 다루는 방식과 태도와도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유다영이 찍은 사진 속의 장면이나 대상은 자기 주변의 사람들,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 자 신이 머물렀던 장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특별하게 멋진 풍경이나 유명한 사람들처럼 포토제닉한 피사체를 좇지 않는 셈이다. 무언가 흥미로운 이미지를 보거나 보여주 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상 속에서 좋아하고 소중한 것들을 간직하기 위한 차원에서 카메라를 드는 것이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점은 작가가 보았거나 카메라로 찍은 이미지를 텍스 트의 형태로 전환하는 과정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유다영의 사진 작업에는 사진에 담긴 비밀 들, 즉 촬영했을 때 보았던 것보다 초과하거나 부족한 무언가에 반응하는 글쓰기 과정이 포함 된다. 카메라라는 기계의 무차별적인 시각과 순간 포착으로 생성된 사진에는 언제나 현실에서 봤던 것보다 무언가가 더 보이거나 덜 보이게 된다. 이는 자신의 선호와 취향이 반영되는 선 별 시각을 지니고, 계속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사물을 보게 되는 인간의 눈에 닿지 않는 영역 이다. 그래서 사진에는 언제나 비밀이 담기고, 이 비밀은 사진의 수수께끼처럼 남게 된다. 이 사람의 얼굴이 이랬던가, 그때 이렇게 슬픈 표정을 지었던가, 그곳에서 저런 옷을 입었던가,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 그 답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불안으로까지 번지지 않게 하는 방식 중의 하나는 사진 속 장면의 육하원칙 정보를 캡션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캡션이 지시하 는 바대로 사진을 바라보면 내가 아는 장면이 되기에 불안을 조금씩 잠재울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영역을 확장하기보다는 캡션이 제공하는 정보의 양만큼으로 제한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즉 알지 못하는 부분은 결코 볼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진의 수용 방식은 보통 시각으로 제한되고, 또 아는 부분 으로만 한정시키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하지만 유다영의 사진과 연동된 글쓰기는 구체적인 정보보다 이미지를 둘러싼 반응과 정서적 분위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캡션 방식의 반대편에 있 다. 그 결과로 유다영의 작품에서는 사진에 글이 더해져도 의미와 이야기가 투명해지기보다는 오히려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텍스트가 더해져도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인 이미지를 바라보거 나 읽으려고 할 때 늘 그랬던 것처럼 시각과 정보에만 의존하는 방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 는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 이미지 앞에서 기존과 다른 방식을, 더 다양한 감각을 동원해 야 하지 않을까.
종이 위에서든, 또 스크린 위에서든 사진은 언제나 납작한 몸으로 눈앞에 나타난다. 우리는 오로지 표면만 볼 수 있는 시각에만 의존해 사진을 바라본다. 사진의 납작한 평면에는 소리 도, 질감도, 냄새도 머물지 못한다. 시야 확보를 위해 떨어져서 바라봐야 하는 눈은 끝내 거리 를 좁히지 못한 채 사진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납작한 이미지가 선명할수록 우리는 눈은 사 진에 더 가까이 갈 수 없고, 우리의 손은 사진에 뻗을 수도 없다.
납작한 사진에 글이나 점자 등 다른 매체와 감각을 불어넣는 작가 유다영은 우리가 눈에만 의 존해 바라보는 사진을 다른 방식으로 느껴보도록 일깨운다. 더 가까이 오라고, 손을 뻗어 만 져보라고. 그 과정은 우리가 사진을 바라볼 때 익숙했던 습관과 관성을 거스른다. 더 나아가 사진을 눈으로만 볼 수 있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다시 생각하도록 타이른다. 각자 결핍된 감 각에 자신의 정체성을 일치시키는 모순에서 벗어나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는 감각의 가능성 을 스스로 열어볼 수 있도록 다독인다.
*본 비평은 2023년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작성 되었습니다.
읽을 수 없는 기억의 감각과 서사
박미연│뮤지엄호두 관장
시각예술은 인간의 ‘보는’ 감각에 의존하는 예술 장르이다. 회화, 조각, 영상, 사진 등 시각예술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는 장르는 매체의 차이가 있겠지만, 창작자는 최종 결과물을 시각으로 감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낸다. 인간의 오감 중에서 유독 시각에 의존하는 시각예술은 시대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상의 재현이 중요한 예술 행위의 목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1830년대 발명된 사진 매체는 사물과 공간의 재현이라는 특질을 갖고 태어났으며, 그 재현성으로 인해 사진은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 놓았다. 또한 사진은 특정한 순간을 포착하고 보존할 수 있는 기술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에 재현의 영역은 공간을 넘어 인간의 기억과 역사라는 시간까지 아울렀다. 사진으로 인하여 시각예술은 3차원에서 4차원을 담아내게 되었다.
근 200년 가까이 쌓여온 사진의 역사는 기록과 재현을 통한 보존의 의미에서, 기술 발전과 담론의 형성과 함께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창조할 수 있는 실험적 매체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또한 사진의 재현성을 뒤집어서 현실을 왜곡하거나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내는 실험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유다영은 사진 매체를 기반으로 작업을 한다. 여전히 사진은 재현성과 객관성이라는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작가는 사진의 전통적인 틀을 해체함으로써 감각과 사유의 영역을 확장하는 실험을 진행중이다. 무엇보다도 사진을 통해 이야기를 기술하거나 독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여, 시각적인 소비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유다영의 사진 속 피사체는 특정 장소나 상황을 가늠하기 어렵게 연출되어 있어서, 관람객은 해석의 여정을 밟아갈 수 없다.
유다영은 수원시립미술관 기획전 «토끼를 따라가면 달걀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에 출품한 사진과 영상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작업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본 기획전은 수원시립미술관의 얍 프로젝트 결과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어서, 전시작에는 프로젝트의 주제인 ‘수원, 장소·기억·사람’이 반영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런데 유다영의 작품에서는 직접적으로 프로젝트의 주제를 확인하기 어려우며, 단초를 발견하기도 쉽지는 않다. 물론 작가는 수원이라는 도시와 이곳의 사람들을 시작점으로 삼아 ‘있었던’ 또는 ‘있었을 법한’ 이야기를 기반으로 삼았지만, 사실과 허구를 뒤섞어 내러티브를 직조함으로써 이야기의 실제를 확인할 수 없으며 배경이 된 특정 장소마저도 과연 진짜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작가의 ‹읽을 수 없는 기억› 등 5점의 사진 신작은 실제로 수원에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가공한 작업이라고 말한다. 관람객은 작가의 말에 의지해 작품의 배경이 수원의 어딘가임을 추적하고자 하지만 단서가 남아 있지 않다. 사진 속 18권의 책은 책등을 뒤로 한 채 쌓여 있어서 이 또한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유다영의 작업은 어딘가를 언제인가를 누군가를 밝히려 한다면 읽어낼 수 없는 작업이다. 관람객은 읽어낼 수 없는 작가의 사진 앞에서 무력해질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사진 매체의 강력한 습성인 독해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시각에 의존하는 인식 체계를 넘어 상상과 사유를 할 수 있는 다양한 감각이 깨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유다영은 작업을 통해 ‘시각적 문해력의 오류와 한계’를 드러내고 있으며, 사진의 절대적인 힘으로 작동하고 있는 재현성과 객관성을 허물고 있다. 작가는 세계를 인식함에 있어서 시각이라는 하나의 감각 시스템만이 작동하고 있지 않음을 제시하며, 촉각, 청각 그리고 통합된 감각을 통해 총체적으로 인지되고 있음을 일깨우려 한다.
작가는 2023년에 발표한 사진 이미지에 UV 코팅한 점자를 올린 작업에서 읽을 수 없는 사진을 촉각적 메시지로 대체함으로써, ‘사진의 질감’을 상상하게 한 적이 있다. 시처럼 쓰인 긴 작품의 제목을 통해 추상 회화처럼 보이는 화면은 사진의 피사체가 커튼이었음을 알게 할 뿐, 그 이상의 정보를 해석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더구나 사진 위의 텍스트는 점자를 알지 못한다면 읽어낼 수 없는, 평면 위의 부조처럼 이미지로 다가온다. 시각 장애인이 점자를 손으로 읽어내도 그 내용에서 구체적인 사진의 설명은 생략되어 있다. 점자와 작품 제목에서 작가의 정서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시각과 촉각을 동원해도 사진의 정보는 읽을 수 없는 상태인 유다영의 사진은 정서적인 환기에 집중하게 되며, 이는 작품의 주관적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만든다.
본 기획전에서 발표한 신작에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주관적 해석의 자율성을 열어두고 있다. 작가는 도시의 숨겨진 이야기와 발견이라는 주제는 가져가되, 자신의 해석과 상상을 원천으로 한 새로운 이야기를 사진으로 꿰어내었다. 그리고 관람객은 여기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유다영은 사진 매체의 전형적인 인식을 반대로 작동하게 만듦으로써, 사진의 정보를 명확하게 식별하지 못하게 한다. 때로는 텍스트와 결합하여 기호의 혼란을 야기하고, 감각의 치환을 일으킨다. 이를 통해 관람객에게 시각적 정보 이상의 감각적 경험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다양한 감각의 활용을 만들어 내고, 자신만의 정서를 환기시키고, 상상의 서사를 쓸 수 있게 한다.
그는 메시지의 강력한 전달 매체인 사진을 다루고 있지만, 사진의 속성을 흐릿하게 만들면서 그 틈들을 인간의 상상과 사유로 메꾸고 있는 듯하다. 작가의 예술적 실험과 시도가 시각예술의 영역 안에서 어디까지 다다를 수 있을지 혹은 그 영역 너머까지 경계를 허물게 될지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한다.
박미연│뮤지엄호두 관장
시각예술은 인간의 ‘보는’ 감각에 의존하는 예술 장르이다. 회화, 조각, 영상, 사진 등 시각예술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는 장르는 매체의 차이가 있겠지만, 창작자는 최종 결과물을 시각으로 감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낸다. 인간의 오감 중에서 유독 시각에 의존하는 시각예술은 시대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상의 재현이 중요한 예술 행위의 목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1830년대 발명된 사진 매체는 사물과 공간의 재현이라는 특질을 갖고 태어났으며, 그 재현성으로 인해 사진은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 놓았다. 또한 사진은 특정한 순간을 포착하고 보존할 수 있는 기술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에 재현의 영역은 공간을 넘어 인간의 기억과 역사라는 시간까지 아울렀다. 사진으로 인하여 시각예술은 3차원에서 4차원을 담아내게 되었다.
근 200년 가까이 쌓여온 사진의 역사는 기록과 재현을 통한 보존의 의미에서, 기술 발전과 담론의 형성과 함께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창조할 수 있는 실험적 매체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또한 사진의 재현성을 뒤집어서 현실을 왜곡하거나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내는 실험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유다영은 사진 매체를 기반으로 작업을 한다. 여전히 사진은 재현성과 객관성이라는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작가는 사진의 전통적인 틀을 해체함으로써 감각과 사유의 영역을 확장하는 실험을 진행중이다. 무엇보다도 사진을 통해 이야기를 기술하거나 독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여, 시각적인 소비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유다영의 사진 속 피사체는 특정 장소나 상황을 가늠하기 어렵게 연출되어 있어서, 관람객은 해석의 여정을 밟아갈 수 없다.
유다영은 수원시립미술관 기획전 «토끼를 따라가면 달걀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에 출품한 사진과 영상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작업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본 기획전은 수원시립미술관의 얍 프로젝트 결과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어서, 전시작에는 프로젝트의 주제인 ‘수원, 장소·기억·사람’이 반영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런데 유다영의 작품에서는 직접적으로 프로젝트의 주제를 확인하기 어려우며, 단초를 발견하기도 쉽지는 않다. 물론 작가는 수원이라는 도시와 이곳의 사람들을 시작점으로 삼아 ‘있었던’ 또는 ‘있었을 법한’ 이야기를 기반으로 삼았지만, 사실과 허구를 뒤섞어 내러티브를 직조함으로써 이야기의 실제를 확인할 수 없으며 배경이 된 특정 장소마저도 과연 진짜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작가의 ‹읽을 수 없는 기억› 등 5점의 사진 신작은 실제로 수원에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가공한 작업이라고 말한다. 관람객은 작가의 말에 의지해 작품의 배경이 수원의 어딘가임을 추적하고자 하지만 단서가 남아 있지 않다. 사진 속 18권의 책은 책등을 뒤로 한 채 쌓여 있어서 이 또한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유다영의 작업은 어딘가를 언제인가를 누군가를 밝히려 한다면 읽어낼 수 없는 작업이다. 관람객은 읽어낼 수 없는 작가의 사진 앞에서 무력해질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사진 매체의 강력한 습성인 독해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시각에 의존하는 인식 체계를 넘어 상상과 사유를 할 수 있는 다양한 감각이 깨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유다영은 작업을 통해 ‘시각적 문해력의 오류와 한계’를 드러내고 있으며, 사진의 절대적인 힘으로 작동하고 있는 재현성과 객관성을 허물고 있다. 작가는 세계를 인식함에 있어서 시각이라는 하나의 감각 시스템만이 작동하고 있지 않음을 제시하며, 촉각, 청각 그리고 통합된 감각을 통해 총체적으로 인지되고 있음을 일깨우려 한다.
작가는 2023년에 발표한 사진 이미지에 UV 코팅한 점자를 올린 작업에서 읽을 수 없는 사진을 촉각적 메시지로 대체함으로써, ‘사진의 질감’을 상상하게 한 적이 있다. 시처럼 쓰인 긴 작품의 제목을 통해 추상 회화처럼 보이는 화면은 사진의 피사체가 커튼이었음을 알게 할 뿐, 그 이상의 정보를 해석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더구나 사진 위의 텍스트는 점자를 알지 못한다면 읽어낼 수 없는, 평면 위의 부조처럼 이미지로 다가온다. 시각 장애인이 점자를 손으로 읽어내도 그 내용에서 구체적인 사진의 설명은 생략되어 있다. 점자와 작품 제목에서 작가의 정서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시각과 촉각을 동원해도 사진의 정보는 읽을 수 없는 상태인 유다영의 사진은 정서적인 환기에 집중하게 되며, 이는 작품의 주관적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만든다.
본 기획전에서 발표한 신작에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주관적 해석의 자율성을 열어두고 있다. 작가는 도시의 숨겨진 이야기와 발견이라는 주제는 가져가되, 자신의 해석과 상상을 원천으로 한 새로운 이야기를 사진으로 꿰어내었다. 그리고 관람객은 여기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유다영은 사진 매체의 전형적인 인식을 반대로 작동하게 만듦으로써, 사진의 정보를 명확하게 식별하지 못하게 한다. 때로는 텍스트와 결합하여 기호의 혼란을 야기하고, 감각의 치환을 일으킨다. 이를 통해 관람객에게 시각적 정보 이상의 감각적 경험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다양한 감각의 활용을 만들어 내고, 자신만의 정서를 환기시키고, 상상의 서사를 쓸 수 있게 한다.
그는 메시지의 강력한 전달 매체인 사진을 다루고 있지만, 사진의 속성을 흐릿하게 만들면서 그 틈들을 인간의 상상과 사유로 메꾸고 있는 듯하다. 작가의 예술적 실험과 시도가 시각예술의 영역 안에서 어디까지 다다를 수 있을지 혹은 그 영역 너머까지 경계를 허물게 될지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