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작한 이미지가 부풀어 오를 때까지

사진은 보이지만, 정작 그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사진과 함께 있는 글을 소리 내 읽어 보지만, 정작 그 이야기에서 들을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다. 사진 위에 올려 진 점자를 만질 수 있었지만, 정작 그 점자를 읽을 수는 없었다. 유다영의 개인전 <점자 이미 지에서 파생된 타이포 시와 노래>(팩토리 2, 2023.7.18.~31.)가 열리는 전시장에서 나는 제대 로 볼 수 없었고, 들을 수 없었고, 읽을 수 없었다. 유다영의 사진은 구체적인 사건을 보여주 지 않았고, 그의 글은 기승전결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으며, 점자를 모르기에 만져봐야 아 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런 연유로 전시장을 맴도는 걸음마다 작은 실패들이 발자국처럼 남겨 졌다.

전시장에서 지나온 동선을 거슬러 어긋난 흔적들을 되밟으며 내게는 모호하게 다가왔던 사진 과 글 그리고 점자에 관해서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사진, 글, 점자 등 여러 매체를 동원할 것일까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나는 왜 보거나 듣 거나 읽거나 그 과정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나 스스로 의 문을 품게 되었다. 그동안 당연하게 보고 듣고 읽었던 수많은 것들, 그렇게 당연하게 여기면 서 나는 과연 무언가를 제대로 보았을까, 들었을까, 읽었을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장에서 무언가를 보았고, 무언가를 들었 고, 무언가를 읽었던 감각과 기억이 남아 있었다. 다만, 그것이 구체적인 정보나 명확한 이야 기처럼 분명한 형태를 띠지 않을 뿐이었다. 내 눈에는, 내 귀에는, 내 손에는 희미한 이미지와 가만가만한 목소리 그리고 어렴풋한 질감이 아직 고여 있었다. 그 여운들이야말로 내가 이곳 에서 이미지, 목소리, 질감을 감지했다는 증거였다. 어쩌면 작가가 원했던 것은 사진과 글, 점 자를 통해 어떤 분명한 의미나 명확한 이야기를 전하기보다는 보고 듣고 읽는 그 과정 자체를 다시 감각하는 일은 아니었을까. 만약 사진 속에서 선명한 대상을 볼 수 있었다면, 글 속에서 뚜렷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면, 점자 속에서도 투명한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면, 본다는 일과 듣는다는 일 그리고 읽는다는 일을 이렇게 다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유다영의 <점자 이미지에서 파생된 타이포 시와 노래>는 관객의 적극적인 개입을 기 다린다. 만약 그동안 대개 그랬듯이 그저 보이는 것에만, 들리는 것에만, 읽히는 것에만 머문 다면 전시장의 작품들은 모호하고 불투명한 모습으로만 다가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시장에 서 스스로 보고 듣고 만지고 읽는 과정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다면, 유다영의 ‘점자 이미지’, ‘타이포 시’와 ‘노래’는 우리의 모든 감각을 환대할 것이다. 이 전시가 장애의 유무, 또는 신체 적 능력의 차이와 상관없이 사진 이미지를 수용할 수 있게 열린 구조를 상상하며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전시장에서 나처럼 선명한 대상이나 분명한 이야기에만 집착하지 않는다면 사진과 글 그리고 점자 중에서 자신에 맞게 선택하고 감각할 수 있다. 사진이 글과 목소리로 바뀌고, 또 점자로 번역되면서 오로지 시각에만 의존하던 방식에서 이탈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 각의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는 작가가 사진을 다루는 방식과 태도와도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유다영이 찍은 사진 속의 장면이나 대상은 자기 주변의 사람들,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 자 신이 머물렀던 장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특별하게 멋진 풍경이나 유명한 사람들처럼 포토제닉한 피사체를 좇지 않는 셈이다. 무언가 흥미로운 이미지를 보거나 보여주 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상 속에서 좋아하고 소중한 것들을 간직하기 위한 차원에서 카메라를 드는 것이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점은 작가가 보았거나 카메라로 찍은 이미지를 텍스 트의 형태로 전환하는 과정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유다영의 사진 작업에는 사진에 담긴 비밀 들, 즉 촬영했을 때 보았던 것보다 초과하거나 부족한 무언가에 반응하는 글쓰기 과정이 포함 된다. 카메라라는 기계의 무차별적인 시각과 순간 포착으로 생성된 사진에는 언제나 현실에서 봤던 것보다 무언가가 더 보이거나 덜 보이게 된다. 이는 자신의 선호와 취향이 반영되는 선 별 시각을 지니고, 계속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사물을 보게 되는 인간의 눈에 닿지 않는 영역 이다. 그래서 사진에는 언제나 비밀이 담기고, 이 비밀은 사진의 수수께끼처럼 남게 된다. 이 사람의 얼굴이 이랬던가, 그때 이렇게 슬픈 표정을 지었던가, 그곳에서 저런 옷을 입었던가,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 그 답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불안으로까지 번지지 않게 하는 방식 중의 하나는 사진 속 장면의 육하원칙 정보를 캡션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캡션이 지시하 는 바대로 사진을 바라보면 내가 아는 장면이 되기에 불안을 조금씩 잠재울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영역을 확장하기보다는 캡션이 제공하는 정보의 양만큼으로 제한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즉 알지 못하는 부분은 결코 볼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진의 수용 방식은 보통 시각으로 제한되고, 또 아는 부분 으로만 한정시키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하지만 유다영의 사진과 연동된 글쓰기는 구체적인 정보보다 이미지를 둘러싼 반응과 정서적 분위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캡션 방식의 반대편에 있 다. 그 결과로 유다영의 작품에서는 사진에 글이 더해져도 의미와 이야기가 투명해지기보다는 오히려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텍스트가 더해져도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인 이미지를 바라보거 나 읽으려고 할 때 늘 그랬던 것처럼 시각과 정보에만 의존하는 방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 는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 이미지 앞에서 기존과 다른 방식을, 더 다양한 감각을 동원해 야 하지 않을까.

종이 위에서든, 또 스크린 위에서든 사진은 언제나 납작한 몸으로 눈앞에 나타난다. 우리는 오로지 표면만 볼 수 있는 시각에만 의존해 사진을 바라본다. 사진의 납작한 평면에는 소리 도, 질감도, 냄새도 머물지 못한다. 시야 확보를 위해 떨어져서 바라봐야 하는 눈은 끝내 거리 를 좁히지 못한 채 사진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납작한 이미지가 선명할수록 우리는 눈은 사 진에 더 가까이 갈 수 없고, 우리의 손은 사진에 뻗을 수도 없다.

납작한 사진에 글이나 점자 등 다른 매체와 감각을 불어넣는 작가 유다영은 우리가 눈에만 의 존해 바라보는 사진을 다른 방식으로 느껴보도록 일깨운다. 더 가까이 오라고, 손을 뻗어 만 져보라고. 그 과정은 우리가 사진을 바라볼 때 익숙했던 습관과 관성을 거스른다. 더 나아가 사진을 눈으로만 볼 수 있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다시 생각하도록 타이른다. 각자 결핍된 감 각에 자신의 정체성을 일치시키는 모순에서 벗어나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는 감각의 가능성 을 스스로 열어볼 수 있도록 다독인다.


박지수





사진이라는 기억술: 유다영의 사진과 전시
윤율리, 일민미술관 책임큐레이터


언젠가 만든 사진 전시의 서문을 쓰면서 큐레이터 수잔 브라이트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사진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그것을 정의하기란 매우 어렵다. 산만한 발언과 같이 뒤죽박죽한 특성은 사진이 지닌 예술로서의 지위와 가치에 대해 많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한다.”(2005/2008, 『예술 사진의 현재』, 이주형 역)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의 견해와 비슷한 판단에 천착해 있다. 동시대 미술관에서 좋은 사진 전시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는 미술관이나 큐레이터들이 사진에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그들과 그들의 관객들이) 사진에 대해 난독증과 같은 상태를 겪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최근 알게 된 유다영의 작업은 내게 조금 다른 생각의 여지를 열어주었는데,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는 사진 매체의 특성이 일반적인 감각의 선입견에 얼마나 과도하게 기대는가를 불현듯 자각하게 된 덕분이다.

유다영은 기억하기나 해석하기의 한 방편으로 사진술을 이용해온 작가다. 일종의 체계로서 굳이 사진이 아니라 사진술이라 쓰는 것은 그의 작업이 결과로서의 사진 이미지뿐 아니라 사진기, 광학 기술, 사진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어느 정도 포괄하며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간지점에서 열린 개인전 《소실의 순간》(2021)에 관한 작가 노트를 통해, 그는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기술적인, 한편으로는 정서적이거나 관계적이기까지 한 효용을 언급한다. 유다영은 2017년 ‘포틀랜드’에서 구입한 카메라를 장치 삼아 전시를 구동시키는데, 이때 폴라로이드 사진은 어딘가 고장난 기념비적 이미지처럼 소환되어 작가가 선택한 언어와 함께 제시된다. 또 같은 연유에서 이 사진들은 어딘가 시대착오적인 필터가 오용된 디지털 이미지를 재현해 내기도 한다. 만일 기억하기의 측면에 뾰족한 방점을 두고 그의 작업을 읽는다면 이 체계를 마땅히 하나의 기억술이라 부를 수 있겠다. 유다영의 작업을 처음 대면하면서 나는 그것이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회상하는 태도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감상과 느낌은 처음과 다른 미묘한 정동을 유발했는데, 그의 태도가 어느 정확한 장면이나 감각을 지금의 소유로 되찾기 위해 망각에 저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자신이 무엇을 잊었는지 잊은 화자가 사라진 기억을 현실의 측정치로 보정하기 위해 ‘무언가 잊은’ 사실을 파괴하려는 시도로 달리 보이게 된 탓이다.

이 지점에서 유다영은 크게 두 가지의 새로운 현실에 의지한다. 첫 번째는 몸이다. 종종 그의 작품에는 불완전하게 부유하는 신체가(혹은 그러한 신체의 강력한 암시가) 사진 내부와 외부에 걸쳐 애매하게 편재한다. 몸은 고전적인 사진의 원리에 틈입해서 기록된 사실과 그 해석으로 인한 사실 양면에 긴장을 만들고 둘 사이의 위계를 흐트러뜨린다. 유다영에게 몸의 사용은 그가 겪은 특수한 감각적 혼란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는 시각적 진실을 의심하기에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사진의 전통을 좌절시키는 수단으로 공연히 신체를 이용한다. 이것은 디게레오 타입의 유산을 상속한 사진가에게 급진적인 전복의 기도다. 흥미롭게도 그의 관심은 최근 이어진 두 번째 개인전 《점자 이미지에서 파생된 타이포 시와 노래》(팩토리2, 2023)에서 일찍이 그가 편재의 수단으로 강구한 몸 자체에 대한 관심에 가까워진다. 전시에 부쳐 쓴 두 번째 노트를 통해 그는 자신의 시도를 “피부에 도달하는 순간”(이하 작가 노트)의 상상이라 적는다.

아름답고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는 언어로 인해 직조되는 또 다른 사실의 나열이다. 유다영이 사진과 함께 제시하는 언어는 증언으로서 사진이 가진 힘을 약화시키고 사진을 더 복잡한 복수(plural)의 채널에 노출시킨다. 실제로 《점자 이미지에서...》 그의 사진은 시각과 촉각, 개념이 적절히 결합하는 미디어 설치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이때 사진은 중의적이고 모호한 기호가 혼재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동시대 환경의 “침몰하는” 미디어와 더 밀착한다. 가령 그의 말과 글이 수행하는 유사 캡션의 기능을 상상해 보자. 마치 인스타그램 셀피 아래 남겨진 의미불상의 메시지처럼, 이 언어는 명료한 이미지가 압축한 일련의 과잉에서 흐릿하고 침착하게 사진 이미지를 후퇴시킨다.

오늘날 사진은 무엇을 왜 기억하려 하는가? 나는 사진의 과다가 역설적으로 기억해야 할 의무의 과다에서 파생한다고 여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너무 많은 이미지의 배면에는 너무 많은 사건이 있고, 사람들은(나는) 모든 사건을 명료하게 삶의 영역으로 재편할 수 없을 때 우선 그것을 판단유예의 클라우드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미지는 적당한 조리개 값과 함께 점점 밝고 명료해지지만 결과적으로는 점점 무엇을 찍은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찍기의 동기와 재현의 동기가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진이 너무 쉽게 읽히거나 그 반대로 읽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 같다”는 유다영의 진술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이어 쓰듯, “그것은 꼭 나쁘진 않다.” 전통적인 매체론이 소멸한 이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사진의 세례를 받지 않은 현대미술은 없다. 이미지 생산의 불가결한 도구로서 이제 동시대 사진에는 대체로 두 가지 선택이 남는다. 모든 것의 원리로 흩어진 끝에 투명한 공기처럼 사라지거나 모든 면에서 사진일 수밖에 없는 특성을 생존시키며 점점 두꺼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영의 사진은 둘 모두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의 감각은 몸과 언어를 방편으로 딛고 새로운 기억술로서 합당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을까? 그것이 다른 사실의 세계를 고유한 매체적 시도로 전환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유다영의 근작들은 꽤 치밀하고 대담하다.